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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건축가 .


아래는 김성홍씨의 설명. 벤츄리는 단순한 형태는 하나의 의미,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대립, 복합, 애매함, 긴장, 이중성이다. 벤츄리는 근대건축에서는 억압되었던 서양건축의 복합, 다층적 의미체계와 갈등 혹은 대립을 읽어내려 하였다. 고대 로마의 건축이론가 비트루비우스가 실용성(用, utilitas), 견고함(强, firmitas), 아름다움(美, venustas)을 건축의 요소로 삼은 것부터가 건축이 하나의 가치체계로 볼 수 없는 복합적, 대립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축을 다양한 관점과 차원에서 이해할 때 지각과 인식은 보다 생생해진다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를 위해 양보하거나 절충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불완전한 것들도 전체적으로 보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벤츄리는 건축을 하나의 규범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벤츄리는 고전 건축을 하나의 규범이나 원칙보다는 다의적으로 해석한다. 현대건축은 프로그램과 기술이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표현도 다양해졌기 때문에 과거보다 건축은 복합적, 대립적이라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미스 반 데어 로에 보다는 알바알토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의 건축에서 자신의 논리를 설명했다. 벤츄리의 이론에는 바우하우스 이후의 아카데미즘, 기술에 대한 허구성, 대중문화를 경멸하는 순수미학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1960년 설계한 필라델피아의 노인집합주거에서 벤츄리는 당시 그 도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던 붉은 벽돌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필라델피아의 도시역사를 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료의 효율성, 경제성, 물성보다는 재료가 함축하는 문화적 의미를 더 강조하였던 것이다. 평면과 입면의 구성에서는 ‘관습적 요소’와 ‘비관습적 요소’를 대비시켜 대립, 이중성을 구체화하려고 하였다. 입구의 백색을 사용한 점, 중앙에 검은 색 기둥을 강조한 점은 색상과 구성에서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것이다. 지붕의 텔레비전 안테나는 텔레비전으로 소일하는 노인을 상징하려는 의도였다.

1962년 설계한 펜실베니아 체스터넷 힐의 주택에서도 ‘절대논리’와 ‘상황논리’를 대비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대칭평면과 입면을 유지하기 위해 구조와 관계없는 가벽을 세우면서도 형태나 비례에서는 정형성을 의도적으로 탈피하려고 하였다. 기능에 따라 대칭을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점, 벽난로를 중심선에서 벗어나게 배치시킨 점, 창을 좌우대칭으로 하면서도 정형성을 탈피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대칭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성, 절대성을 의미하며 비정형적 요소는 현실세계 즉 도시, 사람, 정황을 나타낸다.


벤츄리의 복합성과 대립의 이론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건축은 기본적 용도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문은 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경계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문은 집 주인의 사회적 신분, 개성, 취향까지도 표현한다. 전자를 일차적 기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차적 기능이다. 벤츄리는 근대건축이 일차적 기능은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이차적인 기능은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고 보았다.

둘째, 이차적 기능은 대중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형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숙련된 건축가나 관심있는 소수의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세부적인 디테일, 재료보다는 대중이 선호하는 요소에 중점을 둔 것이다. 실제로 벤츄리의 책에 인용된 대부분의 실례는 건축물의 입면도에 나타낼 수 있는 구체적 요소이다. 아파트 저층의 기둥, 안테나, 창의 배열 등을 통한 건축의 표현은 좋은 예이다.

벤츄리의 두 가지 전제는 바로 건축과 언어가 공유하는 부분이다. 소쉬르의 이론에 비유한다면 형태는 ‘기표(signifier)’이며 그 것이 지칭하는 문화적 의미는 ‘기의(signified)’이다.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인 것처럼 건축형태와 의미 역시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이나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한 결과이다. 기호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어떤 체계내의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한 소쉬르의 이론에 비추어 볼 수 있다. 임의적 관계에 놓인 기표와 기의는 일단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되면 그 관계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건축에 제공하는 것은 건축 역시 언어처럼 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social institution)'라는 점이다. 벤츄리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건축의 아방가르드가 주장한 ‘건축의 자율성’은 창백한 엘리티시즘에 불과한 것이었다.

벤츄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972년에 출간한 “라스베가스에서의 교훈(Learning from Las Vegas)”에서 저속하고 대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미국의 일상환경에서 건축설계에 필요한 자극을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라스베가스의 휘황찬란한 간판과 네온사인에서 그는 미국만이 갖고 있는 버내큘러 건축의 가능성을 찾으려했던 것이다(Venturi, 1972). 20여 년전 미국의 논객 잭슨(J.B. Jackson)이 황량한 사막과 트레일러에서 미학을 읽어낸 것처럼 벤츄리 역시 상업화된 미국의 도시에서 근대건축의 문제를 탈출하려 했다. 라스베가스의 교훈은 ‘장식 헛간’과 ‘오리’의 비유다.


‘오리’는 조각처럼 다듬은 하나의 형태이다. 반면 ‘장식 헛간’은 실용적 건축에다가 상업적 간판을 붙인 건축이다. ‘헛간’은 자동차 도로의 시각적 풍부함에서 나온다.

‘오리’는 기표와 기의가 닮은꼴이므로 벤츄리의 관점에서 ‘아이콘(icon)’이다.

‘헛간’은 기표와 기의가 관습과 문화로 연결된 것이므로 ‘상징(symbol)’이다.

벤츄리에게 근대건축은 상징성을 잃은 ‘오리’이다. 벤츄리가 그리는 도시와 건축은 근대건축의 공간, 형태, 구조의 엄격함을 탈피한 ‘기호의 건축’과 ‘기호의 도시’이다.


벤츄리의 이론은 건축계의 반향을 일으켰지만 탈근대주의의 짧은 수명과 함께 더 이상의 이론적 깊이나 실험을 동반하지 못했다. 근대건축을 아이콘으로 보았던 그의 관점은 처음부터 근대건축을 시각적으로 보는 한계를 드러냈다. 대중에게 호소할 건축 요소를 강조했지만 이 요소들을 통합할 전체적 질서와 논리는 없었다. 부분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과 이를 연결하는 위계가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개의 부분이 모인 합집합으로서 그의 건축이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요소가 많을수록 다의적, 복합적, 인본적 건축이 된다. 벤츄리의 이론은 전통건축의 요소를 차용해서 혼성한 탈근대주의 건축의 시발점이 된다. 벤츄리가 추구했던 대중문화 속의 기호의 건축, 자동차에서 경험하는 기호의 도시는 그 후 20여 년간 근대건축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건축과 언어: 1960년대 이후 서구건축의 이론과 실험인문언어(Lingua Humanitatis) 제2집, 2001.10 제1권 2호,



인터뷰[]

(데니스 스콧 브라운과 함께)


-당신들이 쓴 책은 건축학도에겐 필독서이고 많은 건축가들이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당신들의 사무소만큼 무시당하는 회사도 없다. 왜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모더니즘 제 1의 적이라 생각한다. 말도 안된다. 우린 알바 알토같은 건축가를 좋아하고 빌라 사보아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르네상스나 바로크처럼 과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들은 대부분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다. 많은 건축가가 러시아 구성주의의 구호처럼 자신의 취향을 전 세계에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상위 중산층의 생각을 받아들여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취향의 독재가 존재한다는 뜻인가? 오늘날의 건축은 그 어느때보다 더 다양하지 않나?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대중이 좋아하는 건 저속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건축가들은 고급 미학이라는 고립된 영역으로 물러나버렸다. 그래놓고는 밀려났다며 불평한다. 오늘날은 혁명이 필요할 때도 있고 전통적 태도를 취해야 할 때도 있으니 양 쪽 다 정당화될 수 있는 다문화 시대이다. 그런데 건축가들은 건축의 인간적 특성을 이야기할 때 인간에게 한 가지 측면만 있는 것처럼 말한다. 순진하지 않나?


-건축에 흥미 없는 사람이 많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인가?

현대건축은 너무 추상적이다. 사람들은 좀더 평범하고 이해하기 쉬운 활기 넘치는 건축을 원한다. 그런데 여러 건축가들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고 강철과 유리를 재료로 공장 같은 사무실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군다. 우리는 광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추상화를 추구한다며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해나가는 건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다시 의미를 열어주고 상징적 힘을 새롭게 부여해야 한다.


-하지만 고전적 모더니즘은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았고 상징적 건물이 많이 지어졌다. 에리히 멘델존의 증기기관 주제처럼.

맞다. 하지만 전위파는 자신들이 의미를 다루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상징을 하찮게 여겼다. 천재성에 열광했던 19세기에는 건축가를 신격화하려 했지만 건축가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사실 건축가는 설계 작업을 지금보다 폭넓게 체계화해야 한다. 그러면 건축물이 훨씬 광범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옛날에는 건축에 훨씬 일관성이 있었다.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그런 일관성에 의존할 수 없지 않나?

적어도 새로운 일관성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장식이 허용된다면 아마 그런 노력이 성공을 거둘 지 모른다. 건축사를 되돌아보면 장식적 요소에서 시대와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들은 진지하고 정직한 건물을 믿지만 그 건물들은 정직한 척하는 것 뿐이다. 반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정직한 장식도 있다. 이런 건물이 위선적인가?


-역사에서 많은 것을 빌려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것 같다.

이봐. 역사를 재현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살짝 건드리며 암시하는 게 전부지. 이런 것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마어마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우린 다문화적 다양성을 원하기에 역사를 현재와 섞기 원하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구분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슬로건은 '평범한'과 '추한'이다.


-왜? 오늘날 무수히 존재하는 추한 것들을 미래까지 이어가고 싶은가?

천만에, 불쾌한 건물을 설계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것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모두 독특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미친 세상? 지루한 세상? 미술에는 평범한 것을 관찰하면서 아이디어를 얻는 오랜 전통이 있다. 팝아트가 그렇다.


-의뢰를 거절해 본 적 있나?

물론. 이유는 다양하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중동의 프로젝트를 거절한 적도 있다. 그쪽 통치자와 거래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도 있다. 건축가는 인류와 대중에 관해 자주 이야기하는데 너무 막연하다. 건축가들은 좀 더 명확한 작은 집단과 그 현실이 제공하는 기회를 모색하는 게 낫다.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 오만한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쁜 건축가만 존재한다면 세상이 정말 더 나빠질까?

끔찍한 건축 속에서도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건물이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주장은 동화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건축가들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때가 있으므로 신중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건축이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걸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아름다운 건축을 누릴 권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쁨은 모두가 누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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